겨울나무 2. 겨울나무 2. 윤채원 새들도 자리를 떠나고 바람소리만 맴도는 텅 빈 숲 거친 눈보라 온몸으로 거두며 까칠한 맨살로 제자리에 서 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일은 시린 몸으로 기다림을 끌어안거나 빈 가지 끝에 걸린 삭풍을 다독이며 침묵으로 드리는 정직한 기도 바람길 아래 언 땅 속으로 고동치는 숨길을 애써 숨기고 그대 떠나간 그 자리에서 말없이 서 있는 겨울나무 윤채원의 문학세계/시(詩) 2022.02.12
치자꽃 치자꽃 지난밤 아무도 몰래 몸 열었겠지 깊고 그윽한 향기 품고 하얗게 잠시 피어올랐다가 고요히 지고 마는 여자 나는 그녀의 슬픔을 모른다 겹겹의 옷 속에 감추고 온몸 물 드는 슬픈 꽃 멍 차마 두고 볼 뿐이다 윤채원의 문학세계/시(詩) 2021.10.24
가을 안부 -윤채원 가을 안부 윤채원 찬비 앞세우고 알지 못할 슬픔이 맹수처럼 다가왔다 가지에 붙어 떨고 있는 나뭇잎과 온몸의 깊은 통증은 사뭇 닮아있다 젖은 거리 뒹구는 초록의 후예들 가슴 짓누르는 먹먹함으로 날마다 야위어 가고 있는 중인데 젖은 낙엽 길에서 생각해 보면 나도 한 그루 나무 거친 생을 밀고 가느라 끝없이 바스락거렸던 시간이었다 푸르름의 날들 가고 온통 갈색 옷으로 갈아입는 계절 점점 허룩해지는 나의 안부와 쓸쓸한 거리가 한 몸이 되어간다 작은 창가에 내리는 별빛도 온기를 잃고 차갑게 식어가는 중이다 윤채원의 문학세계/시(詩) 2021.10.11
동구릉을 거닐다 동구릉을 거닐다 윤채원 여자인 나도 가을을 타는지 심한 몸살이 낯선 손님처럼 찾아왔다 한 사흘 흠뻑 앓고 난 후 투덜거리는 몸 달래며 신의 정원으로 들어섰다 아홉 기의 왕릉을 품은 조선의 역사를 향해 소리길 따라 느린 걸음 걷다 보니 미소년의 잘 여문 소리 한 자락과 대금의 애잔한 울림이 발목을 잡는다 쪽빛 하늘 머리에 가득 이고 가마로 오가던 소나무 병풍 길 세파에도 살아남은 결 고운 솔향기가 숲 사이에 길을 내어주더니 600년 넘도록 신전으로 머물던 억새 덮은 건원릉이 눈앞으로 일어선다 애틋한 사랑과 영욕의 세월도 삶과 죽음의 적막 속으로 사라져 죽은 자와 산자를 이어주는 통로가 되었다 자연과 벗 삼아 역사의 정원 거닐다 보니 당당하고 늠름한 무인석의 기세에 먼지 같이 비루한 나의 번뇌는 청량한 바람.. 윤채원의 문학세계/시(詩) 2021.09.27
(시) 우이천의 저녁-윤채원 우이천의 저녁 윤채원 풀벌레 울음 끝에 걸린 초가을 시냇물에 노니는 물오리 한 쌍 평화롭다 풀잎에 맺힌 이슬을 툭 치듯 내 남루 한 자락 스치는 바람 소슬한데 나무토막처럼 서 있던 왜가리가 미꾸라지 한 마리를 낚아챈다 우이천, 소가 귀를 씻은 물 그 온전한 평화를 깨뜨리는 몸짓이라니! 먼데 서녘 하늘에 붉은 커튼 드리우고 반짝이며 흐르는 물소리 끝에 어슬렁거리던 어스름이 번지기 시작한다. 울음도 말라버린 짝 잃은 반달과 함께 노을 속으로 저물어가는 하루 천변 엉겅퀴가 어둠 속으로 어깨를 숨긴다 윤채원의 문학세계/시(詩) 2021.09.13
(시) 개망초 -윤채원 개망초 첫머리에 ‘개’가 붙었다 척박한 땅에서 왜소하게 자란 망초 내 아버지를 꼭 닮았다 모진 세월 떠돌며 발길에 차여도 외로움에 점령당하지 않고 새하얀 꽃술 매달았다 사방이 무채색인 병동 낡은 침대에 갇힌 한 그루 망초 병색 짙어 누렇게 바랜 잎이 죽음을 카운트하고 있다 잡초로 내몰려도 좋으니 햇발 한번 제대로 받고 싶어 바짝 마른 손을 내민다 거기 누구 없소? 개망초라는 이름이라도 누가 한번 불러주오 윤채원의 문학세계/시(詩) 2021.07.20
매우 (梅雨) -윤채원 매우 (梅雨) 간절히 기다리던 손님 7월 장대비로 들이닥쳤다 후드득― 벨소리에 맨발로 뛰어나가 건조해진 입술과 두 손 가만히 내밀어본다 뜨거운 구애 끝에 만나는 긴 포옹과 입맞춤 진하게 풍기는 흙냄새마저 반갑고 직선의 몸짓이 빗어낸 여러 개의 우물 젖은 하늘 길게 올려다보니 먼 길 떠난 얼굴들이 하나둘 그리움의 샘 자극한다 지루한 몸짓에 간절함 담아 서로에게 스며들기 주저하지 않고 진종일 울어대는 저 서러움 내 속의 그대 안에 부드럽게 추락하여 길게 눈 맞춘다. 매실 열매가 익는 절기에 내린다는 梅雨, 이름값 제대로 하고 있다 윤채원의 문학세계/시(詩) 2021.07.11
무수골의 봄 무수골의 봄 비가 내리면 초록초록 봄비가 내리면 물안개처럼 피어나는 네가 그리워 난 한달음에 너에게 달려가게 된단다 연보랏빛 그리움이 가득 스며있는 청량한 그곳에는 언제나 마음이 먼저야 우리의 소소한 행복이 그득하고 너와 나 추억들이 수런거리는 키 작은 마을로 들어서면 여린 초록 풍경과 새소리가 반기는 그곳 더 가까이 시선을 낮추어야 보이는 봄꽃들 너를 만지듯 톡톡 손 내밀면 활짝 열어 보이는 수줍은 너의 미소 비가 내리면 봄비가 내리면 우리 아름다운 추억이 스며든 너를 찾아 무수골 작은 마을로 달려가곤 해 윤채원의 문학세계/시(詩) 2021.04.13
새해 새해 윤채원 택배가 도착했다 정월 초하루 시린 나무 사이로 불현 듯 날아온 선물 꼭꼭 싸맸던 어둠을 풀자 그믐밤 견디었던 겨울새들이 총알처럼 튀어 오른다 새해 종합선물세트 상자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꿈이라는 소프트캔디 내일 이라는 희망이 가득하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내가 이걸 받아도 되는 걸까 윤채원의 문학세계/시(詩) 2021.01.03
거룩한 일상 거룩한 일상 꽁꽁 얼었던 빗장 풀고 한걸음 내디뎠다 아침 해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자 지난밤 뒤척거리던 파도 사이로 훅, 비릿한 바람이 뒤따라 들어섰다 해변에 늘어선 횟집과 횟집 사이 이방인처럼 내걸린 옷가지와 짭조름한 수건 겨울바람보다 더 시린 고단함이 박제되어있다 난파선 같은 삶 속에서도 일상이 꼿꼿하다는 것은 어디서든 살아내고 있다는 흔적 해풍이 드나들어 부스럭거리는 몸에는 검은 갯골이 혈관처럼 퍼져있고 굵은 밧줄에 묶인 배들은 바다를 향해있다 윤채원의 문학세계/시(詩) 2020.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