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사생활/끄적거림 64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말.

찬란한 봄 햇살을 입은 근무지 작은 화단에도 꽃이 피었다. 어느 봄날, 오래 만나지 못해 안부가 궁금했던 지인이 다정한 마음을 예쁜 보자기 속에 담아 해사한 얼굴로 찾아왔고 마음이 통하는 다른 친구는 노란 프리지어 한 다발을 안고 불쑥 방문했다. 한때는 함께 활동하며 우정을 나누던 사람들이 너무 먼 곳에 있는 것 같아 쓸쓸하기도 했다. 난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말을 인정한다. 봄소풍 기분으로 맛난 도시락을 챙겨 방문해준 그녀의 우정에 감사했고, 그리고 내가 애정 하는 프리지아 한 다발로 나를 행복하게 한 친구의 마음에도 감동했다. 그 따스한 마음을 잘 기억했다가 어느 날 문득 나도 그런 마음을 전해주어야겠지.

정지된 시간

시간이 정지된 듯 사방이 낯설다. 기괴한 현실 앞에서 기운 내라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누구를 위로하고, 위로받는 것조차 힘든 여울을 지나는 중으로 이렇게 순간순간 흐르는 것들 또한 운명인 걸까. 우리의 일상을 파고드는 야멸찬 현실이 아프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절망과 견딤의 시간에서 묵묵한 통증이 언제쯤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외롭고 아득한 시대가 길지 않기를 바라고, 서로가 등불이 되어 어디서든 길을 잃지 않기를 소망한다.

잠 못 드는 밤.

어느 날은 명료함이 담긴 찬 공기를 찾아 새벽 산책을 하고, 어느 날은 다큐멘터리 영화 '나의 촛불'을 보며 그해 광화문 광장의 촛불집회를 떠올리고 어느 날은 옆 동네에 있는 작은 갤러리에 가서 작품을 감상하기도 한다. 또 다른 어떤 날은 투덜거리는 무릎을 달래 가며 정형외과로 가서 치료를 받고, 미용실에 들러 기분 전환하고자 예상에 없던 커트를 실행하고,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진 튤립 두 송이에 행복을 느끼는 그저 그러한 일상을 지키려 노력한다. 또다시 선거철이 되니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음이 사방에 가득하다. 함부로 내던지는 약속들과 함부로 버려지는 진실들로 혼잡스럽다. 어느 시인의 말에 의하면, 시인은 밤에 깨어있는, 시대의 눈동자라고 하는데 점점 무감각해지는 자각과 책임 앞에서, 오늘 밤 나는 나..

겨울산

모처럼의 휴일, 투명한 햇살을 머리에 이고 텅 빈 겨울산을 홀로 오른다 들숨과 날숨을 통해 아직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며 눈앞에 보이는 계단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는다 계단 끝으로 펼쳐진 잣나무 숲길에 들어서면 거친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잠시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로지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할 때 엄마의 품 속으로 찾아들 듯 조용히 오르는 이곳 숨을 죽이며 잠든 겨울나무 사이로 겨울바람이 다정하게 차가운 두 뺨에 와 앉는다

무수골 산책

어떤 의욕도 생기지 않고 답답함이 길어지는 어제는 오후 반차를 내고 이따금 가는 찻집에 가서 차 한잔 마시며 친구를 불러냈다. 한달음에 달려나와 준 친구는 나를 말없이 안아준다.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자꾸 창밖으로 시선을 보내더니 무수골에 다녀오자고 한다. 나를 아는 친구가 맞다. 참으로 오랜만에 무수골로 들어섰다. 사방 풍경이 을씨년스럽다. 한참을 산책하다 추위가 느껴져 무수울이라는 작은 카페로 입성.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나의 헛헛함과 슬픔은 내 몫이라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산다는 게...슬픔

시린 겨울 아침이다. 올해의 시작과 끝은 귀한 인연을 하늘나라로 보내는 것으로 시작되고 끝이 나는 것 같다. 2021년이 시작되자마자 들려온 지인의 부고로 한동안 휘청거렸는데, 연말은 함께 활동하던 다정하고 명랑했던 인연이 또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훌쩍 하늘나라로 떠나버렸다. 영안실에서 만난 영정사진과 눈이 마주치자 차오르는 눈물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사진에서 걸어 나올 것 같은 미소 띤 그녀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어린 자녀들과 황망한 눈빛의 배우자를 보고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서둘러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떠올려보았다. 늘 긍정적이고 미소가 예뻤고. 기타 연주도 시낭송도 좋았던 그녀. 집 앞 주차장에 도착했지만 한참을 머무르며 마음..

안녕, 안녕.

안녕, 안녕. 나를 스쳐간 크고 작은 바람결, 순간에 진심이었던 나의 마음들, 점점 사그라들고 있는 우리의 감정들, 잠시 곁을 내주었던 그리운 시간들 문득, 실제로 내 안으로 들어왔던 시간들이었을까 싶기도 해. 어쩌면 이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르지. 우리가 가능하다고 믿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눈에 잘 띄지 않는 아주 작은 꽃들이라도 거저 꽃송이를 올린 것이 아니라 햇빛과 물, 공기, 바람, 그리고 이따금씩 건네는 다정한 눈길을 모아 한송이 꽃을 피워낸 것일 거야 다시 설렘의 바람이 불어올 때까지 마음이 어디쯤인지 느껴질 때까지 미안함과 섭섭함이 사라질 때까지 마음밭 깊은 곳에 잠시 묻어두고 지금은 안녕.

흔적

빗소리가 창문을 울린다. 오늘은....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던 예전의 흔적을 하나 지웠다. 불현듯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소중한 기억들도 어느 날엔, 그저 어떤 날에 대한 조각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나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봄이었다 겨울이었다 한다 딱히, 이유는 없다' 그 기억들을 하나 하나 지워 가다 보면 언젠가는....

카페 백란

점심 약속이 있어 우이동 계곡 근처를 방문했다. 평소 시간이 맞지 않아 미루었던 약속을 휴가를 이용해 지키는 중이다. 오늘 만나는 분들은 나이도, 직업도, 다르지만, 이따금 만나 차 한 잔 나누는 인연이 된지도 몇 해가 훌쩍 지났다. 그러고 보면 어디서든 마주치면 반갑게 안부를 궁금해하는 인연이라는 것도 참 감사한 일이다. 점심 식사 후 백란으로 이동해보니, 그곳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백란은 이따금 가는 곳인데 들꽃을 가꾼 소담스런 풍경에서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모두들 풍경을 찾아, 조용한 곳을 찾아 숲 가까이, 산 가까이 찾아들지만, 사실 그 어느 곳도 코로나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코로나19로 조심스러웠지만, 우리는 구석 자리로 이동해 차 한잔을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