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채원의 문학세계/시(詩)

동구릉을 거닐다

새벽풍경 2021. 9. 27. 08:24

동구릉을 거닐다

 

                                                    윤채원

 

 

여자인 나도 가을을 타는지

심한 몸살이 낯선 손님처럼 찾아왔다

한 사흘 흠뻑 앓고 난 후

투덜거리는 몸 달래며 신의 정원으로 들어섰다

 

아홉 기의 왕릉을 품은 조선의 역사를 향해

소리길 따라 느린 걸음 걷다 보니

미소년의 잘 여문 소리 한 자락과

대금의 애잔한 울림이 발목을 잡는다

 

쪽빛 하늘 머리에 가득 이고

가마로 오가던 소나무 병풍 길

 

세파에도 살아남은 결 고운 솔향기가

숲 사이에 길을 내어주더니

600년 넘도록 신전으로 머물던

억새 덮은 건원릉이 눈앞으로 일어선다

 

애틋한 사랑과 영욕의 세월도

삶과 죽음의 적막 속으로 사라져

죽은 자와 산자를 이어주는 통로가 되었다

 

자연과 벗 삼아 역사의 정원 거닐다 보니

당당하고 늠름한 무인석의 기세에

먼지 같이 비루한 나의 번뇌는

청량한 바람과 함께 부서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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