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릉을 거닐다
윤채원
여자인 나도 가을을 타는지
심한 몸살이 낯선 손님처럼 찾아왔다
한 사흘 흠뻑 앓고 난 후
투덜거리는 몸 달래며 신의 정원으로 들어섰다
아홉 기의 왕릉을 품은 조선의 역사를 향해
소리길 따라 느린 걸음 걷다 보니
미소년의 잘 여문 소리 한 자락과
대금의 애잔한 울림이 발목을 잡는다
쪽빛 하늘 머리에 가득 이고
가마로 오가던 소나무 병풍 길
세파에도 살아남은 결 고운 솔향기가
숲 사이에 길을 내어주더니
600년 넘도록 신전으로 머물던
억새 덮은 건원릉이 눈앞으로 일어선다
애틋한 사랑과 영욕의 세월도
삶과 죽음의 적막 속으로 사라져
죽은 자와 산자를 이어주는 통로가 되었다
자연과 벗 삼아 역사의 정원 거닐다 보니
당당하고 늠름한 무인석의 기세에
먼지 같이 비루한 나의 번뇌는
청량한 바람과 함께 부서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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