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채원의 문학세계/시(詩) 49

아침 풍경21

아침 풍경. 눈이 내린다. 오전에 내리는 눈은 쓸쓸함의 무게를 더한다. 공연히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그만 시선을 거두어들인다 저 분분한 눈발은 누구에게로 스며드는 걸까 분명 사연이 있어 내리는 눈. 게으른 고양이 일행을 어슬렁거리게 하고 지붕 위 까마귀도 노래하게 만드는 저 눈발을 나른하게 시선으로 붙잡아두려 하자 내 눈에서 내 가슴에서 뜨거운 눈이 내린다.

달콤한 눈물24

달콤한 눈물 간절히 기다리던 손님이 미지근한 바람을 앞세우고 소나기라는 이름으로 들이닥쳤다. 후두둑 소리에 맨발로 뛰어나가 건조해진 입술과 두 손을 가만히 내밀어본다 얼마만의 입맞춤인지 진하게 풍기는 이 흙냄새마저 반갑다. 직선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전율을 동반한 반가운 해후에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둘씩 늘어난다. 간절함과 애달픔이 빚어낸 달콤한 눈물이 서로에게 스며들기를 주저하지 않고 내 안에 그대 안에 오래 머무르길 바라며 길게 눈을 맞춘다.

9월은25

나의 9월은. 간절한 기다림을 기억하고새벽이슬로 다가선 그대가 반가워 설렘으로 문을 엽니다. 지독한 열꽃을 피워낸 계절은온몸을 달구던 지난 시간의 무료함 속으로 밀어내고초록 들판을 서서히 금빛으로 물들일 그대를 기다리는 이유는이리저리 흔들려 비루해진 마음과 신열로 무너져 버린 나를 조금씩 세우기 위함이고청명한 하늘아래 알알이 익어가는 빛 고운 열매와그윽한 들꽃향기 피어내는 그대의 세계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머지않아 푸른 하늘과 다정한 바람을 입은 투명한 햇살은 우리의 시선 속으로 들어와 우주를 성숙시키고사람과 사람사이에 흐르던 서툰 이기심을 벗겨내우리를 한층 평화롭게 만들 것입니다. 그대여.방금 열리기 시작한 그 문 앞에 서서 계절을 이어가는 그대의 따스한 숨결을 모아이 가을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열어가..

세월호 그 후 1,000일-윤채원

별이 된 아이들아.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이별이 무뎌지는 게 아닌 것은 분명해. 사랑했던 기억보다는 사랑 후에 오는 상처의 깊이가 훨씬 깊고 오래가는 법이거든. 차가운 광장에 모여 앉아 차가운 물 안에서 사그라져 갔을 너희들을 떠올리면 덩달아 가슴이 시리고 아파. 우리도 이렇게 서럽고 미안하고 아픈데 온기 있던 너희들을 품고 웃었던 엄마와 아빠는 어떨까? 가슴에 떼어버릴 수 없는 큰 돌덩이를 매단 채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는 시간과 고통 속에서 사투 중이겠지. 너희들과 이별 후 잠시 정지된 시간에 머물렀던 것 같은데, 변한 것도 책임지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어느새 1,000일이 지났다니 믿을 수 없어. 그게 미안한 우리는 촛불의 온기를 전하려고 삼삼오오 광장으로 모여 별이 된 너희를 잊지 않겠다는 약속..

빈의자26

빈 의자 윤채원 순간을 머물다 길게 저물어 간 사람아 산다는 것은 나를 버리고 너를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사그라지면서도 그대 안에 머물고 싶어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내가 서럽도록 밉다 낯선 세상으로 이끌어 나를 고운 꽃으로 피어나게 한 당신 반짝였던 그 시간은 그리움으로 물들고 서서히 잊기 위해 나는 그대를 덜어내고 그대는 나를 흩어지게 해야 할 일 먼 훗날 첫눈을 안고 소리 없이 내게 온다면 그대 내게로 와 준다면

(시) 아버지의 시28

아버지의 시 윤채원 팔십 고개를 눈앞 고지로 두고 아버지가 시를 쓰셨다 단 한 번도 시 나부랭이를 배워본 적이 없지만 인생의 통찰과 삶의 궤적을 살피며 예리한 눈초리로 적어 내려간 인생이라는 힘든 고개를 단 여덟 줄로 담백하게 담아낸 시 투덜거리던 강산이 몇 번이 변했지만 그럭저럭 버텨 온 인고의 시간이 스스로 대견하시다기에 그저 물기 가득한 눈으로 그 시간을 상상해보다 바짝 긴장했던 몸을 해제시킨 후 왈칵거리는 마음의 빗장을 열고 팽팽한 줄 위에서 노니는 현의 울림에 몰입해보기로 작정해버렸다

(시) 빈길29

빈 길 윤채원 지루한 소음은 차단되고 외로움과 적막이 가득한 흙길을 홀로 걷는다 문득 스쳐 간 그 사람 속내가 궁금한 날엔 문밖으로 서성거리는 햇살 한 줌 낚아채 낡은 외투 주머니에 꽂아 두고 초행길인 양 조심조심 걷다 보면 허기 가득한 햇살은 온기를 부르고 이내 무료함을 수장시킨 후 키 작은 나무를 지나쳐서 짙은 숲이 내어주는 품속으로 들어선다 산 그림자 길게 들어앉은 텅 빈 그 길

부재(2)30

부재 윤채원 한가롭던 삶의 무게가 유독 버겁게 느껴지던 그 날 홀연히 침묵으로 스며든 너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깊은 상처위에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네가 머무는 동안 편평하던 일상이 진득해지고 꼬리를 감추는 외로움은 깊어간다 몰입이 길어지는 동안 서서히 차오른 너의 불안은 피할 수 없는 통증이 되어 흐르고 끝내 서러운 눈물을 불러내고야 말았다

(시) 기다림31

기다림 윤채원 너를 잃고 깊은 상처에 눈물이 마를 새가 없지만 시 한편 건졌으니 잊기로 하자 너를 버리는 일은 나를 깨뜨리는 일보다 더 서러운 일이지만 한 번쯤 되돌아 볼 흔적이라 믿기로 하자 홀로 훔쳐내던 나의 눈물이 그대 가슴으로 흘러 꿈결에라도 달려와 준다면 그대를 닮은 우직한 나무 한 그루 준비하여 푸른 잎들을 피어내리라 그대가 내게 오는 날 빛 고운 햇살 부여잡고 살며시 안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