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채원의 문학세계/시(詩) 49

드라이플라워

드라이플라워 꽃이 사랑을 대신할 수 있는지 꽃이 누구를 대신할 수 있는지 남루하게 빛나는 나 고개 숙인 채 비늘 떨구다가 숨겨두었던 향낭을 열어 당신에게 가는 중이다 사람들의 시선 벗어나 옛사랑에 아파하는 그 마음 위해 스스로 숨은 꽃이 되어 거꾸로 매달린 채 메말라간다 당신이 맑은 눈과 뜨거운 손길로 비쩍 말라진 내 몸을 움켜쥐는 그 순간을 가끔 상상해본다 꽃의 영화를 던져버린 나는 지치고 젖은 몸으로 그대가 온다면 기꺼이 두 손 내밀어 품어 주리라 내가 아픔을 대신할 수 있는지 내가 위로를 대신할 수 있는지

환절기

환절기 저물어가는 계절을 따라 걷는다 제법 시린 바람을 타고 길거나 짧게 뒹구는 무리에서 제각기 다른 나뭇잎을 찾아 한 편의 시를 줍듯 경건하게 허리를 숙여 한 장 한 장 걷어 올린다 가늘게 눈 뜬 햇살 틈새로 흔들이는 저 여린 풀과 꽃들 머물다 기어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너와 나의 체취가 다르듯 우리는 서로 다른 기억을 간직한 채 걷는다

걷는 남자

걷는 남자 멀리 차가운 장대비 사이로 제 몸보다 더 높게 쌓아 올린 눅눅한 일상을 묵묵히 끌고 한 남자가 어제처럼 걷고 있다 가로등이 환하게 켜진 건너편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산책하던 다른 사내는 위태로운 그 걸음을 길게 바라보다 이내 그 폭우 속으로 들어섰다 두리번거리며 고단하게 살아내느라 닳아 해어진 생의 무게가 눈물을 흘리자 고개 숙인 수레를 천천히 밀던 사내는 빗속을 걷는 남자의 세상에 색을 입힌다

구둔역에서

구둔역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간이역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던 은행나무와 향나무가 먼저 반긴다 무수한 사연이 교차하던 녹슨 선로 위에 햇살에 붉어진 코스모스가 미소를 보이면 온몸으로 흔들리며 멀어진 시절이 아프다 속절없는 기다림이 스며있는 구둔역 낡은 의자에 기대어 앉아 한때는 가득했던 너를 비우는 사이 순간 붉어졌던 석양이 길게 눈감아 버렸다

옥잠화(1)

옥잠화(1) 더위 가늘어지는 처서 저녁 건들바람 이는 작은 뜰 안에서 그윽한 향기 뿌리며 부푼 얼굴로 서서히 단장을 시작하는 옥잠화 달이 차 오르는 깊은 밤이면 낮동안 침묵하던 푸른 이파리 사이 삐져나온 꽃대 끝에 피어올라 한 생애 뜨겁게 노니는 순백의 옥잠화 구름에 스민 달빛이 부르면 홀로 피어나 분주하던 옥잠화 이른 아침 수줍게 꽃잎 떨구며 너를 향해 멈춰버린 싱그런 향기

청령포에 서서 47

청령포에 서서 (1) 신록이 진저리 치는 여름 한낮 속내를 감춘 서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 청정한 숲 기와지붕 아래로 허리 숙인 소나무가 들어서 있다 기구한 운명의 빛바랜 御服(어복)이 덩그러니 놓인 초라한 어소가 민망하여 시름에 잠긴 노산대에 올라보니 그리운 여인을 향해 목 놓아 울던 망향 탑 앞에서는 산새가 지저귀고 사내의 구슬픈 비가를 보고 듣던 노구의 관음송이 비스듬히 누워 유유하게 흐르는 서강을 토닥인다. 청령포에서(2) 신록 진저리치는 여름 한낮 열일곱 빛바랜 어복 덩그러니 소나무에 걸려있네 노구의 관음송이 눈을 감고 비스듬히 서서 속내를 알 수 없는 서강을 토닥이고 있네

낯선 봄3

낯선 봄 혼돈의 담벼락에 내걸린 통증은 깊어 가는데기색 없이 다가 온 네 곁에서는꽃들은 속절없이 피어오른다반짝 환희였다가이내 슬픔이 되고 마는 저 고운빛들명랑한 지저귐을 잃어버린 새들과도톰해진 영산홍 꽃망울의 기상이 더디다향기를 잃어버린 계절은 헐겁게 웃고생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은봄 속으로 떠나는 나들이를 기다린다.

가을 편지4

가을편지 찬비를 앞세우고 이별하는 너의 등 뒤로 말라버린 나뭇잎은 시린 뒷모습을 재촉하고 흐릿한 하늘을 이고 거친 생을 밀어내느라 호수처럼 맑았던 당신의 푸른 생은 상처로 먹먹한 날들로 그득했다 어깨를 고쳐 세우던 짧은 날을 단숨에 잃어버린 그대의 낯빛은 빈 거리의 쓸쓸함을 닮아있고 별빛도 온기를 잃고 눈물을 흘리는 이 밤 느리게 찾아오는 여명을 향해 속삭인다.안녕, 안녕

한계령 가는 길5

한계령 가는 길 한산한 시외버스 좁은 의자에 나란히 앉은 낯선 그대와 나 그리웠던 날숨과 들숨은 여전히 멀고 창밖으로 분분한 흐린 눈발은 빈가지에서 달랑거리는 나뭇잎을 닮았다 두어 칸 앞자리에서는 앳된 연인들의 입맞춤이 분주하고 공연히 붉어지던 그대와 내가 멈춘 곳은 빈 세월이 묻어나는 눈 덮인 한계령 휴게소 모락모락 김 오르는 뽀얀 황태국을 사이에 두고 침묵으로 오래 전 일상을 쏟아내지만 머리와 가슴의 거리는 이미 수 천리 흘낏거리는 식당 여사장의 사사로운 미소에 휘날리는 창밖 눈발만 헤아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