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윤채원
여름 햇살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초록향이 진하게 배어나던 숲 속에선 어느새 신선한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과 서툴게 부딪치며 가을이 익어가는 소리를 내고 있다. 그래서일까 아름다운 계절이 주는 설렘을 매정하게 외면할 수 없어 하릴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근래의 하늘은 유난히 맑고 푸르러 눈을 들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는 방법을 가지고 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으나 나의 경우는 글로 감정을 표현하는 편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안의 부재와 결핍에서 쏟아지는 삶의 또 다른 여백이다. 자기안의 숱한 감정들을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써 우리의 내면이 더 깊어지고 정서적으로 성숙할 뿐 아니라 상처까지도 치유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렇기에 순간의 감정을 메모한 쪽지의 짧은 글귀까지도 아끼는 편이다. 능력이 되어준다면 울림이 있는 글로 자기 성찰뿐 아니라 상대의 내면에 훈기를 불어 넣어 다정한 인연을 만들며 살고 싶다.
이미 지나간 일이 되어버렸지만 내게도 마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사실 그도 나를 좋아했다고 믿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그와는 한동안 따뜻한 마음을 나누며 지내왔다. 비슷한 코드는 아닌 게 분명해보였지만 그에게선 왠지 아날로그가 주는 편안함이 묻어났었다.
“우리 친구 할래요?” 나의 제안에 그는 수줍게 웃었고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이따금 만나 차 한 잔에 소소한 일상을 내비치는 것이 고작이지만 오래 전 첫 연애를 시작하던 그 때처럼 설렘이 있어 나의 감성 창고는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사람의 됨됨이가 가볍지 않고 속이 깊은 그는 듬쑥한 사람이었다. 세련된 여러 말보다 때로는 침묵이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는지 조잘조잘 말하기보다 듣는 일에 더 집중하는 사람이었다. 돌이켜보니 그에겐 상대를 자연스럽게 끌어 당겨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묘한 끌림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섬세한 성격의 그는 추상적인 언어에 온기를 담아 향이 실린 글을 쓰고 싶어 했던 나의 고민을 눈치 채고 도닥거림과 격려하기를 쉬지 않았었다.
식물은 적당한 물과 햇볕을 주고 따뜻한 마음으로 믿어주게 되면 어느새 푸른 잎사귀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꽃과 향 그리고 열매를 내보임으로 키우는 기쁨을 전달해준다. 우리 인간의 관계도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내 앞으로 다가서는 인연들에게 진심으로 대했고 상대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편이다.
따뜻하게 전달되는 첫 느낌을 중요하게 여기는 지금도 여러 인연의 끈을 쉽게 내려놓지 못하고 끌끌한 관계를 유지하기위해 늘 동동거리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같은 미래를 꿈꾸는 사이는 아니었다 해도 마음 맞는 친구로 한동안 행복했기에 돌연한 그의 잠수가 이해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나를 향해 조심스레 마음을 내비치며 오랜 친구로 머물고 싶다던 그와 나 사이에 신뢰와 배려의 크기가 달랐던 것일까. 한동안 서운함과 상실감이 주는 혼란에 잠시 휘청거렸지만 섭섭한 감정을 오래두지 않으려고 애썼다. 우리의 기억은 사실이 아니라 그 순간에 우리 안으로 파고들었던 느낌을 기억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 후로도 가끔씩 내 안으로 추억의 작은 바람이 불어들었다. 다양한 기억의 바람이 불어와 날 흔들고 갈 때는 쓰러지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맞서지 않고 그 바람 속으로 파고들어 같은 방향으로 흔들리는 방법을 선택했다. 의식으로 우리안의 무의식을 통제해 따분하고 건조한 일상을 사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기보다는 부족하고 연약한 자기 앞의 현실을 먼저 인정하고 감성적인 부분을 더해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살고 싶다. 저 멀리서 바람이 불어온다. 새로운 변화를 꿈꾸는 강한 바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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