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속을 걷다
‘프랑스 남부에서 출발하여 국경을 넘어 스페인 서쪽 끝 산티아고 800km 순례자의 길’. 세계인들에게 걷기열풍을 일으켰던 산티아고 가는 길을 소개하는 첫 머리이다. 2~3년 전 산티아고 가는 길이 열병처럼 퍼져나갔을 때, 가보고 싶은 마음과 어쩌지 못하는 현실의 괴리감을 좁히기 위해 관련서적을 찾아 읽고는 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제주의 올레 길을 만들고, 지리산의 둘레 길을 만들고 내가 사는 집근처의 북한산의 둘레 길을 만들어냈다. 대한민국도 어느새 온통 둘레 길의 열풍에 빠져있다. 시간을 내어 올레길이며 둘레 길을 걷고 싶은 마음에 미리 트레킹화까지 준비하고 있었지만 제주 올레 길도 지리산 둘레 길도 걷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 보내고 있었다.
아침안개가 자욱하던 날, 아침 일찍 시간을 내어 북한산 둘레 길을 걸어 볼 요량으로 길을 나섰다. 가끔씩 집 근처 초안산을 산책하고, 도봉산 마당바위까지 몇 번 다녀오기도 했지만 근래엔 도통 걸어 본 기억이 없어 살짝 긴장이 되는 초행길이었지만 ‘북한산 둘레길’이라는 이름이 주는 친근함이 다정하게 느껴졌다.
북한산 둘레 길은 13개 코스, 44km로 구성되어있다고 한다. 13개 코스를 다 걷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23시간 정도라 한다. 소나무 숲길, 흰 구름길 등 코스이름이 소박하고 예뻤다. 어느 길을 선택할 까 잠시 고민하다가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이 주었던 친근함을 잊지 못해 첫 둘레 길 코스는 2.3km 거리로 약 1시간 10분가량이 소요된다는 ‘순례 길’을 코스로 잡았다.
순례 길은 솔밭근린공원에서 시작해 헤이그 밀사인 이준 열사의 묘역으로 연결되어 있다. 무덤은 그의 흉상이 설치되어 있는 탑 아래로 태극기가 새겨진 덮개 석을 얹고 있었다. 숲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보면 왼쪽으로는 보광사를 오른쪽으로는 4.19탑 묘지를 사이에 두고 길게 숲길이 연결되어있다. 최대한 자연을 그대로 살리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는 순례 길은 편안한 숲길과 흙길, 그리고 나무테크 길이 편안한 기분을 조성해준다.
산 속에서 자연이 주는 상쾌함과 안개가 걷혀 청명해진 하늘 빛, 눈부신 햇살과 낙엽이 밟히는 소리가 참 좋다. 북한산 산허리를 따라 산책하듯 걷는 둘레 길에는 연세 있는 분들이 단체로 올라 올 정도로 편안한 길이다. 지방에서 단체로 관광을 오셨다 들린 것인지 나이 지긋한 어르신 40여 분들이 줄을 지어 오르시는데 그 옷차림을 보니 둘레길이 최종 목표는 아닌 것이 분명한 차림새다. 그 분들께 천천히 길을 양보하며 전망대에 오르니 4.19의거 때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스러져 간 민주열사의 영혼들이 잠들어 있는 4. 19 공원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며 저절로 경건한 마음이 스며든다. 어르신 한 분은 전망대에 기대어 공원을 내려다보며 깊은 상념에 빠져 있다. 그 분 옆으로는 앙증맞은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한쪽 자리에 앉아 잠시 그 영혼들을 위한 명복을 잠시 빌어본다. 벤치 아래로 놓여 진 작은 책장에 얌전하게 놓여 진 낡은 시집 두 권이 반갑다.
순례 길은 말 그대로 애국지사의 묘소들이 곳곳에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길을 걷다보면 이준열사 묘소, 이시영 부통령 묘소 등 곳곳에 애국지사의 묘소가 있어서 그런지 차분해지고 경건해진다. 그래서일까 특별히 누군가와 동행하지 않고 홀로 걷는 이 길이 지루하지 않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걷는 중간 중간 친절하게 안내판이 부탁되어 있어 초행자라도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마주 오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저절로 미소가 피어나는 눈인사를 나누고 잘 정리된 오솔길을 걸으며 여러 가지 상념에 젖어보기도 한다.
마른 먼지가 조금씩 일어나는 숲길을 지나다보면 겨울을 나기위해 알몸이 되어버린 나무들도 보이고 수북하게 쌓인 낙엽조차도 심오해 보인다. 온통 주변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보면 어느새 밭두렁이 나오고 아파트 뒷길 주택가로 들어선다. 둘레길이 주는 매력중 하나가 숲길과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는 주택가를 지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한다는, 그래서 서로 아끼고 품어 주어야함을 상기시켜 주는 것 같다.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둘레 길을 찾고 있다는 증거들이 여기저기서 포착된다.
‘여기는 주택가입니다. 조용히 지나가 주세요.’, ‘애써 키운 농작물을 훼손하지 마시오’,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 라고 적한 문구들이 주렁주렁 걸려있다. 간혹 협박에 가까운 문구를 발견해 당혹스럽기도 했는데 걷다보니 그들의 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용하던 마을이 둘레 길의 일부가 되고부터 쉬지 않고 들리는 소음과 쓰레기에 시달리고 있으니 화가 날 만도 하다. 그 경고성 문구가 아니더라도 둘레길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위해 아름다운 둘레 길을 걷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예절이기도 하다.
도심 가까운 곳에 국립공원인 북한산이 있는 것도 큰 자랑거리며 감사해야 할 일인데 산책하듯 풍경을 감상하고 자연과 대화하며 걸을 수 있는 둘레길이 생겼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 도심에서 눈으로 보이는 풍경에 익숙했던 우리 곁으로 왈칵 달려 든 둘레길이 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하루였다.
13개의 코스 중 이제 겨우 하나의 코스를 둘러보았을 뿐인데도 행복감이 밀려든다. 무분별하게 생기는 샛길을 막자는 것도 둘레 길을 만든 이유 중 하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랑스러운 북한산 허리에 선물처럼 다가 온 둘레 길을 아끼며 다양한 의미와 이름을 담고 있는 또 다른 코스의 풍경 속으로 서둘러 여행을 떠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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