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외로움
아버지의 외로움
아버지는 나에게 있어 고향이고 그리움의 상징이다.
자두나무 아래에 서면 까만 얼굴에 주름 패인 아버지가 생각난다. 살면서 생활에 힘겨움이 밀려올 때 또는 나 자신이 무력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나의 활력의 주문은 아버지를 떠올린다.
어릴 적 아버지를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늘 바쁘셨다. 그러기에 우리 집에는 자연스레 동네 어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알고 계셨다. 동네 어른들 생신날을 그 집 자손들은 더러 잊는 수가 있어도 아버지는 잊는 법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마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사적인 일이나 공적인 일들은 거의 아버지와 의논하여 결정지어지는 일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 아마 아버지가 동네 유지가 아니었나 싶다.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게 진보적인 사고를 가지고 계셨던 분이라 여러 가지 일들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기기도 했으나 그 사업들은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고 우리 집 가세만 기울고 말았다. 그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아버지의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좋은 결과를 얻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그것으로 만족한다며 미소를 보이셨는데 우리 가족들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쓸쓸해했던 기억이 있다.
훗날 우연히 아버지와 단 둘이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처음으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계획했던 일들이 뜻대로 되지 않고 들 실패만 반복되어 힘겨웠던 “28년 비탈길 인생”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며 자서전을 써 달라고 조심스럽게 부탁하셨다. 작가의 꿈을 안고 어줍잖은 솜씨로 문예지에 공모한다며 습작을 하는 둘째딸이 아버지가 보기엔 이미 노련한 작가처럼 보였나 보다.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의 우울한 미소와 허전해 하시는 눈빛으로 이야기 해주신 아버지의 비탈길 인생에 대해 들었다. 탄광을 발굴하다가 타의에 의해 중단 되었던 일, 한의학 공부하다가 할아버지 반대로 꿈을 접었던 일, 친구 보증 섰다가 채무를 대신 갚아야 했던 일.
그 숱한 사연들 속에는 아버지의 꿈, 인생관, 가치관이 세상의 잣대로 재어 성공하지 못해 빛을 잃고 맺힌 한이 겹겹이 접혀 있었다. 그것이 가슴속에 응어리가 되어 아버지는 세상에 대한 분노로 심신이 변해가고 있던 것이다. 아버지 당신은 그렇게 변해 가는 자신을 두려워하며 가슴속의 외로움을 둘째 딸인 나에게 털어놓는 걸로 마음의 평정을 찾고자 하셨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부탁을 듣고서 어찌 할 수 없는 나 자신의 무능함이 가끔 내게 가위눌림으로 다가섰다. 아버지도 더 많은 인내의 시간을 보내심으로 인해 머리색도 백발이 되었고 깊게 주름 패인 얼굴이 되셨지만 이제 더 이상 자서전 이야기를 꺼내시지 않는다. 포기한 것일까? 아니면 흐르는 세월 속에 당신 일생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묻기로 하신 것일까?
한 여름 뜨거운 햇살을 받고 고향집 뒤뜰에서 아버지와 인고의 세월을 함께 했던 자두나무 아래에 서면 그곳에 아버지가 계신다. 올바른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아가도록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아버지가 주름 패인 얼굴에 미소를 흠뻑 담고 서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