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채원의 문학세계/수필. 에세이

두려움, 그 적당한 설레임

새벽풍경 2013. 3. 24. 23:20

두려움, 그 적당한 설레임


아직도 비가 내린다. 밤새워 내리던 비가 아침이 되었는데도 도통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덩달아 심장박동이 점차로 빨라지는가 싶더니 얼굴까지 홍당무처럼 붉게 달아오른다.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서랍 깊숙이 방치해뒀던 청심환 반쪽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언젠가 귀동냥으로 들었던 긴장감을 덜어준다는 그 말만 굳게 믿고 염소 똥처럼 생긴 환을 반으로 갈라 삼켰다. 텁텁한 것이 오히려 비위를 상하게 했는지 속은 더 불편해졌다. 이래저래 불안감은 포도 알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나온다. 한 달 전쯤부터 은근히 기다려오던 시간이 분명했지만 막상 마주하게 되자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을 해서 그런지, 초등학생이나 중학생들을 보면 친근하고 익숙하다. 반면에 학부모로 만나는 어른들은 아직도 내겐 버겁다. 혹시 의학사전에 ‘어른 공포증’ 이라는 병명이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어른들은 괜찮은데 학부모로 만나면 긴장을 하고 하동거리게 된다. 가끔 학부모님들과의 상담시간조차도 보짱이 부족해서 영 불편하고 어색하기만 하다.

집 근처에 새로 생긴 어린이도서관에서 논술강좌를 시작하는데 강의를 맡아 달라고 요청이 왔다. 드디어 나의 진가가 드러나는가 싶어 뒷갈망할 자신도 없이 유난을 떨었다. 사실 그동안엔 대부분의 수업이 집에서 진행되다보니 답답해하던 차라 욕심이 생겼다. 그 곳 강좌가 어린이 논술교실이라 어른들과는 직접 부딪칠 일도 없을 터라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호사다마였을까. 내 속에서 잠자던 교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적당히 건방져지려는 찰라 찬바람이 들이닥쳤다.

논술 강좌를 맡기 위해서는 학부모를 상대로 두 시간 특강을 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또한 그 특강에 따라서 수강신청인의 숫자가 결정된다고 슬쩍 부담도 함께 던져준다. 예상치 못한 일이라서 덜컥 겁이 났지만 이제 와서 못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후론 특강준비보다는 벌벌 떨고 있는 심장을 안심시키느라 더 많은 시간을 보낸 것 같다.

드디어 오늘이 결전의 날이다. 주룩주룩 비까지 내리니 심기는 불편해지고 얼굴은 이미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이쯤 되니 청심환의 효과가 빛을 발해 날 진정시켜 주길 바랄뿐 모든 것이 울가망하다.

강의실까지 동행하여 참석 인원수를 높여 주겠다는 남편을 마다하고 택시를 탔는데 불안감에 현기증이 더해져 숨이 막힌다. 천천히 가고 싶은 마음과는 다르게 매정한 택시는 너무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 힐끗거리며 눈치를 준다.

그리 크지 않아 안온한 분위기였던 소강당은 유난히 넓어 보이며 걱정을 보태주고 있다. 성급한 학부모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 강사가 누군지 목을 빼며 기다리는 눈치다. 당황한 나는 내색을 감추려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팀장님의 소개말이 끝나고 담담한 척 마이크 앞에 섰지만 그토록 기다리던 청심환의 효과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라 답답할 뿐이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좋은날입니다. 그렇죠?” 이렇게 인사를 했던 것 같다. 마이크를 통해 들리는 내 목소리엔 두려움과 떨림이 고스란히 묻어 나와 열없어졌다. 눈앞에 보이는 그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준비해 간 자료에 코를 박으며 결국에는 초보자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주눅이 들어서일까 준비된 10분간의 휴식시간도 잊고 강의를 이어갔다.

어느 순간이었을까. 낯선 감정이 내 온몸을 휘감아 돌았다. 그 강한 떨림이 몸속 깊이 유쾌한 기운으로 스며들었다. 첫 경험이지만 분명 이것은 긴 두려움 끝에서 맛보는 아주 특별한 쾌감이라는 것을 육감으로 알 수 있었다. 어느새 얼굴의 화끈거림도 사라지고 목소리도 편안해졌으며, 준비했던 농담도 잊지 않고 강의 속에 녹여낼 수 있었다.

강의실에서 마주한 그들의 표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보다 훨씬 더 부드러워진 그들 중 몇몇은 특강을 마치고 잠시 휴식하고 있는 내게 커피를 전하며 인사까지 해주고 간다.

첫 경험은 대부분 서툴다던데 꼭 그런 것은 아닌가보다. 혼자 착각에 빠져 있을 즈음 분위기 파악 못하고 있던 자만심이 고개를 내밀었지만 일부러 모른 체 했다.

기분 좋게 거리로 나오니 아까보다 더 거칠게 비가 내린다. 하지만 굵은 빗줄기마저 전투를 마치고 온 나를 위한 축포 같아서 고스란히 맞고 싶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자동차 한 대가 내 옆으로 미끄러지듯 다가와 선다. 돌아보니 어쩌면 전사인 나보다 더 가슴 졸였을 남편이 창문을 내리며 겁먹은 눈길로 한마디 건넨다. “괜찮았어?” 대답대신 하늘을 향해 양 팔을 한껏 벌려본다. 참 기분 좋은 하루다.